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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text(Korean)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화랑과 상무정신 기사입력 2001-04-06 18:43:00 학자는 정직해야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갈릴레오 이래 많은 학자들은 할 말을 못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하는 일을 수없이 많이 겪었다. 역사학도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예가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청년 문화’라고 칭송받는 신라시대 화랑(花郞)에 대한 해석이다. 기존 한국사에서 평가되는 화랑의 모습은 호국의 꽃이었고, 청년 문화에 대한 찬사의 극치였다.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화랑이 그토록 극찬을 받은 지는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화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역사학자는 1920년대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이어 1930년대 일제 치하 일본 역사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화랑을 거론할 때만 해도 그렇게 찬란한 존재가 아니었고 그저 화랑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청년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었으며 나중에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역사학자 이선근(李瑄根) 대령에게 한국사에서 청년 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명칭 바뀐후에도 계속 여자▼ 이에 따라 이 대령이 ‘화랑도연구’(1954)를 출판했을 때 화랑은 하루 아침에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청년 문화의 유산으로 부상했다. 그의 주장을 빌리면 이충무공(李忠武公), 개화파, 독립협회, 동학혁명, 3·1운동이 온통 화랑 정신을 빛낸 사람들이나 사건들이었다는 것이다. 화랑의 본래 모습이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화랑이 당초 여자였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최초의 화랑은 원화(源花)라고 불렸으며, 그들이 하는 일은 추석때 서라벌에서 아낙네들이 모여 패를 갈라 길쌈내기를 하던, 이를테면 부락 축제의 리더 역할이었다. 처음 원화가 된 사람은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명의 여자였다. 그러던 것이 부락제가 국가적 행사로 자리를 잡고 규모도 확대됨에 따라 원화는 화랑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화가 화랑으로 바뀌었을 때에도 화랑은 여자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사진1’을 보자. 이것은 ‘삼국유사’ 원본 중에서 화랑에 관한 부분을 복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화랑이 ‘花郞’이 아니라 ‘花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첫번째의 열쇠가 된다. ‘꽃 같은 여자’라는 말은 있어도 ‘꽃 같은 남자’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화랑은 ‘花娘’이라고 쓰는 것이 옳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랑을 ‘花郞’이라고 표기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유사’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문헌을 왜곡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라나 고려 시대 사람들은 ‘花娘’을 어떻게 발음했을까? 우선 ‘사진 2’를 보자. 이 책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신 후 한자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동국정운’(東國正韻·국보 142호)으로 여기에는 ‘娘’을 ‘냥’이라고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최고의 어문학자였던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사진3)와 조선조 후기 음운학자 정윤용(鄭允容)의 ‘자류주석’(字類註釋·사진4)에도 ‘娘’은 ‘냥’으로 발음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花娘은 어떻게 발음되었을까? 신라의 이두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까지도 그것은 ‘화냥’이었다. ‘화랑’이 아니라 ‘화냥’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얘기를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대 어문학의 태두인 양주동(梁柱東)은 필생의 저작인 ‘조선고가(古歌)연구’(1954)를 발간한 후 “내가 죽은 후 1세기 안에는 이 책의 일점일획도 고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국보(國寶)라고 칭했다. 그는 이 책에서 화랑을 언급하면서 ‘화랑이 한때 타락해 화냥의 칭호를 들었다’(372∼374쪽)고 기록했고 이선근도 그렇게 풀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화랑은 당초부터 화냥이었지 화랑이 타락해 화냥이 된 것이 아니다. 그후 삼국 중에서 신라에만 특유하게 존재하던 모계 중심 사회가 점차 퇴조를 보이면서 화랑도 남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때는 이름도 국선(國仙)으로 불렸으며 그 최초의 인물이 설원랑(薛原郞)이었다. 화랑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상무(尙武)정신과 같은 남성 문화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화랑의 선발 기준은 여전히 ‘얼굴이 고운 남자’(삼국사기 진흥왕 37년조)였다. 화랑이 진정 무사도였다면 왜 우람한 남자를 뽑지 않고 얼굴이 고운 남자를 뽑았을까? 그것은 모계 사회의 풍습 때문이었다. 정치와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모계 중심의 부족 사회에서의 여왕은 부락장인 동시에 제주(祭主:무당)였고 의녀(醫女)였다. 따라서 신라의 여왕은 이미 그의 주신(主神)에게 출가한 몸이므로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왕이 혼자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고, 그 얼굴 고운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신라의 여왕들, 특히 진성여왕과 그 얼굴 고운 남자들 사이에 벌어진 진한 에로티시즘에 관한 얘기는 ‘삼국사기’ 진성여왕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소위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화랑을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의 어디를 봐도 화랑과 세속오계를 관련지어 설명한 곳이 없다. 미시나 아키히데의 저서 ‘신라 화랑의 연구’에는 세속오계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결국 세속오계란 화랑과 무관한 서민 청년들의 생활 규범이었다. 세속오계가 화랑의 계율이었다는 것은 이선근의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였을 뿐이다. ▼고려시대땐 '병역 면제'▼ 내가 화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신라 후기가 되면서 화랑이 국선으로 변하고 다시 고려조에 들어오면 국선에게는 ‘병역을 면제해주었다’는 대목을 읽었을 때였다. 그것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당시는 남자들이 이리저리 군대에서 빠지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부친이 사망한 부선망(父先亡) 4대 독자로 현역에 복무한 나로서는 병역 면제자 ‘화랑’을 상무 정신의 화신처럼 설명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선조에서 화랑은 엉뚱한 뜻으로 사용됐다. 다시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나오는 ‘사진5’를 보자. 그림에 나타나 있는 격(覡)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박수무당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화랑’이라고 풀이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박수무당을 화랑이라고 불렀음을 의미한다. 같은 무당이라고 하더라도 박수(白手)무당은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한량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파생됐다. 망국의 비분강개함을 느끼며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화랑의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신채호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청년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기 위해 화랑을 무사도로 미화한 이선근의 논리는 분명 ‘빗나간 애국심’이었다. 차라리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항쟁에서 청년의 기백을 찾는 것이 더 온당한 필법이었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Japanese translation [シン・ボンニョン教授の韓国史を新しく見ること]
花郎と尚武精神 学者は正直でなければならず、真実を言える勇気が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 うが、ガリレオ以来、多くの学者たちは言いたいことを言えず、言いたくないことを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数えきれないほど多く経験した。歴史学 もそういう悩みから自由ではあり得なかった。ひとつの例が我々の歴史で最高の「青年文化」だと賞賛を受けている新羅時代の花郎(ファラン)についての解釈 だ。既存の韓国史で評価されている花郎の姿は護国の花であり、青年文化に対するの賛辞の極致であった。 まず明確にしておくべきことは、花 郎がそのように絶賛を受けてから、まだ50年にもなっていないという事実だ。 花郎を肯定的に評価した最初の歴史学者は1920年代の丹斎 申采浩(シン・チェホ)であった。続いて1930年代の日帝治下に日本の歴史学者 三品彰英と池内宏が花郎を取り上げたときにしても、そんなにきらびやかな存在ではなく、ただ花郎という存在があったということを確認する程度であった。 そうこうするうちに朝鮮戦争が起こると、李承晩大統領が青年の愛国心が必要であると考え、当時の陸軍本部の政訓監であり、のちに精神文化研究院長を経た歴 史学者 李宣根(イ・ソングン) 大佐に、韓国史から青年文化の遺産を発掘しろと指示した。 ▼名称が変わった後でもずっと女性▼ こ れに従って李大佐が「花郎徒研究」(1954)を出版した時、花郎は一夜にして韓国史で最も偉大な青年文化の遺産に浮上した。彼の主張を借りれば、李忠武 公、開化派、独立協会、東学革命、3・1運動がすべて花郎精神を輝かせた人々や事件だったというのだ。 花郎の本来の姿が果たしてそ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か? 花郎が当初女性だったということは学界でもみな認めている事実だ。最初の花郎は源花(ウォンファ)と呼ばれ、彼女たちのした仕事は、秋夕(訳注:旧盆)の 時に徐羅伐(訳注:ソラボル=新羅の都)に女たちが集まって組を分けて機織賭けをした、例えば村祭りのリーダーの役割だった。 初めて源花 になった人は南毛と俊貞という二人の女性であった。そのような村祭りが国家的行事に地位を取られて規模も拡大されるにしたがって、源花は花郎という名称に 変わった。ここで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事実は、源花が花郎に変わったときでも花郎は女性だったという事実だ。 これを確認するために「写真1」を見よう。これは「三国遺事」の原本中から花郎に関する部分をコピーしたものである。ところが、ここには我々が教科書で 習ったように花郎が「花郎」ではなく「花娘」と記録されているという事実だ。 これはこの問題を解決する一番目の鍵になる。「花のような女 性」という言葉はあっても、「花のような男性」という言葉はあり得ないという点から、花郎は「花娘」と書くのが正しかった。このような点から見れば、花郎 を「花郎」と表記した韓国の歴史学者たちは「三国遺事」も読んでいない人であるか、でなければ意図的に文献を歪曲したと見るしかない。 問題はここで終わらない。新羅や高麗時代の人々は「花娘」をどのように発音したのだろうか? まず「写真2」を見よう。この本は世宗大王がハングルを創製した後に、漢字をどのように発音すべきかを教えるために編纂した「東国正韻」(国宝 142号)で、ここでは「娘」を「ニャン」と発音するようになっている。 それだけでなく、朝鮮朝最高の語文学者だった崔世珍(チェ・セジ ン)の「訓蒙字会」(写真3)と朝鮮朝後期の音韻学者 鄭允容(チョン・ユニョン)の「字類註釈」(写真4)でも「娘」は「ニャン」と発音するようになっている。それでは花娘はどのように発音されていたのだろ うか? 新羅の吏読は言うまでもなく、朝鮮朝までもそれは「ファニャン」だった。「ファラン」ではなく「ファニャン」だったのだ。その次の話をもっとする必要があ るだろうか? 現代語文学の泰斗である梁柱東(ヤン・ジュドン)は畢生の著作である「朝鮮古歌研究」(1954)を発刊した後、「私が死んだ後、1世紀中にはこの本の一 点一画も直す必要がないだろう」と言いながら自らを国宝と称した。彼はこの本で花郎に言及する際、「花郎が一時堕落して花娘の称号を持っ た」(372~374頁)と記録して、李宣根もそのように解釈した。しかし、彼らの主張は間違っていた。 花郎は当初から花娘であり、花郎 が堕落して花娘になったのではない。 その後、三国中で新羅にだけ特有に存在した母系中心の社会が順次退潮を見せながら、花郎徒が男性に変わり始めた。 この時は名前も国仙と呼ばれていて、その最初の人物が薛原郎(ソル・ウォルラン)だった。花郎が女性から男性に変わったと言って、それがすぐに尚武精神の ような男性文化に変わったのではなかった。 花郎の選抜基準は相変らず「顔が美しい男性」(三国史記 真興王37年条)であった。 花郎が 本当に武士道であったら、なぜ威厳のある男性を選ばず、顔が美しい男性を選んだのだろうか? それは母系社会の風習のためだった。政治と宗教が明確に区分されなかった母系中心の部族社会での女王は、部落長であると同時に祭主(巫堂(訳注:ムーダ ン;巫女))であり医女であった。したがって、新羅の女王は既に自分の主神に出家した体であるので、結婚を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かと言って、女王が一人で床に就くことはできず、その顔の美しい男性たちと寝床を共にした。新羅の女王たち、特に真聖女王とその顔の美しい男性たちの間で行われた濃いエロチシズムに関する話は「三国史記」真聖女王編に塑像するように記録されている。 それでは、いわゆる世俗五戒はどのようになっているのか? 残念ながら花郎を扱っている「三国史記」「三国遺事」「海東高僧伝」のどこを見ても花郎と世俗五戒を関連付けて説明した所がない。 三品彰英の著書「新羅花郎の研究」には世俗五戒という単語さえ出てこない。 結局、世俗五戒とは花郎と関係がない庶民の青年たちの生活規範だった。世俗五戒が花郎の戒律だったというのは李宣根の「小説」に出てくる話だけだっだ。 ▼高麗時代には「兵役免除」▼ 私 が花郎についてもう一度考えてみようと決心したのは、新羅後期になりながら花郎が国仙に変わり、再び高麗朝に入ると国仙には「兵役を免除してやった」とい う事項を読んだ時であった。それは私に衝撃的だった。当時は男性たちがあちこちの軍隊から抜け出した時期だった。それでも父親が死亡した父先亡4代独子と して現役で服務した私としては、兵役免除者「花郎」を尚武精神の化身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韓国の歴史学を到底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朝鮮朝で花郎はとんでもない意味に使われた。 再び崔世珍の「訓蒙字会」に出てくる「写真5」を見よう。絵に出ている覡という字は現在「白 手巫堂」を意味する。ところで朝鮮時代にはこれを「花郎」と解釈したということは、その当時に白手巫堂を花郎と呼んだことを意味する。同じ巫堂と言って も、白手巫堂は白手乾達(訳注:文無しのごろつき)の意味も持っている。 閑良(訳注:遊び人)という言葉もここから派生した。 亡国の悲憤慷慨さを感じて、青年たちに感動を与えるために花郎の話を持ち出すしかなかった申采浩を理解できないことはない。 しかし、朝鮮戦争という廃虚の中で青年たちを戦地に行かせるために花郎を武士道として美化した李宣根の論理は明らかに「外れた愛国心」だった。むしろ高句麗の唐に対する粘り強い抗争から青年の気迫を探すことがより穏当な筆法だった。 建国大教授(政治外交史) P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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